치밀한 분석과 뛰어난 연기 감수성으로
웰메이드 캐릭터 완성
‘굿바이~ 샤라큘라!’ ... 호연으로 졸작 논란을 잠재우다
커튼콜 후에도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막이 내리고, 천정의 조명이 극장을 환히 밝혀도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완벽을 넘어선 완벽!’
무대 위의 이 젊은 배우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표현을 찾지 못했다. 그의 연기력을 압축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 묘사의 한계에 봉착한 것 같아 좌절감이 일었다. 순간, 그가 그동안 밟고 지나간 필모그래피가 뇌리에 스쳤다. 이젠 실력이 정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어느새 그 이상에 올라 서 있었다.
썰물처럼 객석을 빠져나가는 관객의 입에선 “역시!”라는 감탄사가 빗발쳤다. 거대한 파도가 물결을 이룬 듯 밀려든 이 찬사는 모두 한 사람을 향한 것이었다. 뮤지컬 <드라큘라>로 무대를 지배한 배우 김준수가 그 주인공이었다.
올 하반기 가장 주목 받는 작품 중 하나였던 브로드웨이 뮤지컬 <드라큘라>가 막을 내렸다. 불멸의 존재 ‘드라큘라’와 ‘미나’의 시공을 초월한 슬프고도 운명적인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은 개막 전 국내 주요 언론사와 예매처의 여론조사에서 가장 기대되는 뮤지컬 작품으로 꼽힐 만큼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자 평단으로부터 개연성 약한 스토리와 급작스런 결말로 기대에 못 미친다는 박한 평가를 받았다. 다만 국내 최초로 도입된 4중 회전 무대와 화려한 조명의 그로테스크한 연출 그리고 ‘Fresh Blood’ ‘Loving you keeps me alive’ ‘It’s Over Play Off and Transition’ 등의 넘버로 대표되는 프랭크 와일드혼의 매혹적인 음악은 호평을 끌어냈다.
그나마 류정한, 정선아, 조정은, 양준모 여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렌필드’ 역의 이승원 등 배우들의 열연이 객석의 불만을 잠재웠다. 그 중심에는 타이틀롤을 맡은 김준수가 있었다. 김준수는 어느덧 연기파 배우로 성장해 관객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호연이 없었더라면 이 설득력 약한 구조의 스토리는 관객의 외면을 받았을 것이다.
낮게 드리운 그림자만으로도 드러나는 뚜렷한 존재감
김준수의 존재감은 공연 기간 내내 압권이었다. ‘드라큘라’는 그가 완성해낸 웰메이드 캐릭터였다.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또 다른 마성의 매력을 만들어냈다. 무대 뒤편에 그의 실루엣이 드리워지는 것만으로도 객석까지 을씨년스러운 긴장감이 퍼졌다. 그의 몸짓이나 노래뿐 아니라 숨소리에서도 짜릿한 흥분이 전달됐다.
그는 빛을 갈망하지만 어둠에 사는 존재인 ‘드라큘라’를 다각적으로 빚어냈다. 때론 격렬한 분노와 맹렬함을 가진 뱀파이어가 분출됐고, 때론 상처와 연약함 그리고 슬픔을 동시에 갖고 있는 순정남이 그려졌다. 그의 다양한 연기패턴은 거칠지만 로맨틱하고, 무섭지만 아픈 사연을 가진 ‘드라큘라’를 완성했다.
그의 섬세한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드라큘라’를 신에게서 등을 돌린 타락한 괴물이 아닌, 사랑에 목숨을 건 연민의 대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인도했다. 엉거주춤한 걸음걸이의 괴기스러운 백발노인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좀 더 늙고 외롭고 못되진 그리하여 삶의 기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뱀파이어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는 위대하고 애잔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승화시켰다.
카리스마 캐릭터 설득력 드높인 ‘눈 호강’ 비주얼
김준수는 비주얼부터 단연 돋보였다. 그는 거부할 수 없는 위험한 유혹의 손짓을 내미는 ‘드라큘라’라는 인물을 설정하기에 가장 적합한 배우였다. 가죽 망토는 중후한 카리스마를 도드라지게 했다. 클래식하고 고급스러운 액세서리는 백작의 위용을 더했다. 무엇보다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 선홍빛 헤어칼라는 아찔하고 강렬한 매력을 섹시하게 부각시켰다. 반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창백한 눈빛은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이 치밀한 캐릭터 분석과 연구의 결과였다는 사실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는 프레스콜 기자회견에서 “‘드라큘라’라는 배역 자체가 판타지적이라는 점에서 차별성을 주기 위해” 머리카락을 핏빛으로 물들였다며 “피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품에 임하는 그의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다만, 이제는 자신을 죽이려하는 ‘반 헬싱’ 일당을 맞아 바디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타이트한 스키니 가죽바지를 입고, 반쯤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드러난 맨살과 함께 ‘장풍’을 쏘며 격렬하고 뜨거운 격투를 펼치는 현란한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완벽을 넘어선 완벽!’ ... 상대를 리드하는 극강의 연기 감수성
천재적이라고 칭송받는 그의 연기 감수성도 뛰어났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지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바람 같은 존재인 ‘드라큘라’에 상상력을 덧입혔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400년이나 기다렸다는 설정은 많은 기지를 발휘해야 했다. 더구나 ‘미나’를 사랑하지만, 그에게 만큼은 저주받은 ‘영생’을 줄 수 없다는 마지막 결심을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했다.
결국 오랜 기다림 끝에 다시 찾은 사랑의 희열은 뼈마디까지 마비되는 것 같은 고통과 비극적 죽음으로 공허하게 마무리된다. 하지만 객석에는 ‘드라큘라’를 두렵게 했던 건 인간의 파국이 아니라, ‘미나’를 간절히 원했던 자기 자신이었다는 깨달음이 남는다. 그토록 기다렸던 ‘미나’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신에서는 심장소리마저 몰입에 방해가 될 정도로 애틋하고 달콤했다.
김준수의 이런 연기는 자신뿐 아니라, 상대 배우의 캐릭터 구축에도 도움을 줘 작품 전반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미나’ 역의 조정은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김준수는)감수성이 매우 풍부하다. 이는 연기적인 계산에 따른 게 아니라 음악이 주는 영감, 상대와의 호흡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며 “그와 연기할 때 상대 배우는 인물의 감성을 따라가면서 연기하게 된다”고 칭찬했다.
<드라큘라>가 막을 올리기 전, 제작사 오디뮤지컬컴퍼니의 신춘수 대표는 “이 작품이 김준수의 뮤지컬 대표작 중 빠지지 않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의 말마따나 뮤지컬 <드라큘라>의 김준수는 이전에 찾아보기 어려운 가공할 무대장악력과 연기 스케일로 객석에서도 소름이 돋을 만큼 생명력 넘치는 작품을 탄생시켰다.
마치 아름다운 한 편의 꿈을 꾼 듯한 지난여름이었다. 얼마간 이 열병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 듯 하다.
enterpost.net/11450